지은이: Ursula Le Guin
흔히 세계 3대 판타지 소설로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 연대기>를 꼽는다.
앞의 두 개는 오래 전에 읽었고, 이번에는 조금 인지도가 떨어지는 <어스시 연대기>를 읽어보려고 한다.
판타지 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반지의 제왕>은 재미있기도 할 뿐더러 언어학자인 J. R. 톨킨의 전문 지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 더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언어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원서로도 읽었다.
톨킨의 동료이자 친구인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어린이를 위한 책으로 <반지의 제왕>만큼 스펙터클하거나 아주 심오하지는 않지만 작가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판타지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잘 묘사된 책이라 정말 은혜 받으며 읽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반지의 제왕>도 기독교적 세계관을 묘사한 것으로 보였는데...
두 개의 판타지 소설이 영국 교수들이 쓴 것인 반면 <어스시 연대기>는 미국 작가가 쓴 것이라 그런 면에서도 차이점이 있을지 궁금했다.
<어스시 연대기>는 <어스시의 마법사>, <아투안의 무덤>, <머나먼 바닷가>로 구성되는 어스시 트릴로지와 이후에 나온 3권을 합쳐 총 6권으로 이루어져있다.
<어스시의 마법사>(A Wizard of Earthsea)는 어린 소년이 두려움과 악을 극복하고 온전한 자아를 찾게 되면서 게드라는 위대한 마법사와 현자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인간이 가진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있다.
로크의 마법사 학교는 호그와트를 떠올리게 하고, 그림자는 볼드모트를 연상시키고, 새매의 얼굴 흉터는 해리 포터의 이마 흉터를 생각나게 한다.
조앤 롤링도 이 소설을 분명 읽었겠지?
하지만 기대했던 판타지 소설이라기보다는 성장 소설 같았다.
"아이 적엔 마법사가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인 양 여겨졌겠지... 하지만 진실은 진정한 힘이 커지고 지식이 넓어질수록 갈 수 있는 길은 점점 좁아진다는 것이다. 끝내는 선택이란 게 아예 없어지고 오직 해야 할 일만이 남게 된단다."
내 삶의 바운더리를 깨닫게 되자 마냥 자유롭다고 느끼던 삶이 선택이 없는 삶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자유가 사라진 기분이랄까?
뱀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하와의 기분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운더리가 없는 자유는 재앙이라는데...
"어른이 된다는 건 참는 것이지, 힘을 다스리는 이가 된다는 건 아홉 배나 더 인내한다는 것이고."
<아투안의 무덤>(The Tombs of Atuan)은 테아란 소녀가 게드의 인도로 인습과 속박의 세계에서 선택과 자유의 세계로 건너가며 자신의 이름을 찾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유란 진정 홀가분하게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인가?
"자유란 무거운 부담이었다. 영혼이 걸머져야만 하는 낯설고도 엄청난 짐이었다... 그것은 선물처럼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내려야만 하는 선택이었으며, 선택이란 몹시도 힘든 것일 터였다."
<머나먼 바닷가>(The Farthest Shore)는 아렌이라는 젊은 왕자가 게드와 함께 죽음의 땅을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오랜 소망인 불멸은 과연 축복인가?
르 귄은 죽음 없이 삶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빛과 어두움이 서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죽음이 없는 삶이란 무엇이겠느냐? 변화 없는 삶, 영영 지속되는, 끝없는 삶이란? 그게 죽음이 아니고 뭐겠느냐?"
<테하누>(Tehanu)는 마법의 힘이 사라진 게드가 곤트로 돌아간 후 테나와 함께 테루를 키우면서 테루가 테하누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멋진 마법은 등장하지 않지만 여전히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스시의 이야기들>(Tales from Earthsea)은 5개의 단편 소설들로 이루어져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로크에 마법사 학교가 세워지게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마법사의 길을 거부한 소년의 이야기이며, 세 번째 이야기는 오지언와 그의 스승의 이야기이고, 네 번째 이야기는 게드가 대현자 시절의 일화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는 <테하누>와 <또 다른 바람 사이>의 이야기로 남존여비(?) 사상에 대한 비판이다.
<또 다른 바람>(The Other Wind)은 상당히 은유적으로 쓰여 있다.
그것은 나뉘어졌던 삶과 죽음이 하나 되는 이야기로 이 소설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말은 침묵 속에서만
빛은 어둠 속에서만
삶은 죽어감 속에만 있네
<어스시 연대기>는 여느 판타지 소설처럼 흥미진진한 재미나 긴장감, 속도감은 떨어지지만 자아를 성찰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라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다.
판타지 소설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철학적이었다.
존재하는 삶과 행동하는 삶에 대해서, 자유와 선택에 대해서, 지식과 힘의 사용에 대해서, 선과 악에 대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대중성과 오락성이 떨어지고 영화도 흥행에 실패했다는데 왜 <어스시 연대기>가 3대 판타지 소설에 들어가는지 알 것 같다.
이 책을 판타지 소설로만 생각하고 읽는다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