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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020.02.13 <미스터 트롯> 열풍

 

집에 케이블 방송도 안 들어오고, 공영 방송도 안 보고 사는 터라 연예계에 대해서는 깜깜무소식인 나에게도 작년 가을부터 송가인이라는 이름이 자주 들렸다.

<미스 트롯>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신데렐라가 되었다는 가수.

그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지난 달 초에는 <미스터 트롯>이라는 프로가 1회부터 난리라는 소문이 돌았다.

트로트(trot)라는 영 단어는 "빨리 걷는다."라는 뜻인데, 스포츠댄스의 한 종목인 4/4박자의 폭스트롯(fox-trot)이 191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하면서 그 스텝과 리듬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댄스 용어로만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 트로트가 도입된 것은 1920년대 말이다.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신문물은 일본을 통하여 들어오게 되는데 당시 일본에는 일본 고유의 민속음악과 폭스트롯을 접목한 엔카가 유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트로트는 서구 음악과 일본 음악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5음음계를 사용하는 4/4박자의 서구풍 트로트는 우리나라 민요의 어법을 계승한 신민요와 함께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트로트라는 용어가 아직 사용되지 않았고 <유행가> 또는 <유행소곡>이라고 하였다.

1960년대 이후 <뽕짝>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다가 1970년대 이후부터 <트로트>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한 때 <전통가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트로트>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트로트인데 도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야단들인지 궁금하여 인터넷으로 들어가 다시 보기를 하였다.

아니! 이건 내가 아는 트로트가 아니네.

<트로트>라고 하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울려 퍼지는 뽕짝 메들리가 생각나던 나에게 <미스터 트롯>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것은  장르만 트로트일 뿐이지 그야말로 엄청난 show였다.

다양한 출연자들의 면면도 흥미를 배가시켰다.

그중 나의 관심을 끄는 출연자는 13살의 트로트 신동이라는 정동원과 독일에서 성악을 공부했다는 김호중이었다.

"노래를 잘한다."라고 할 때 그 말은 세 가지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목소리가 좋다"라는 의미일 수 있다.

둘째, 노래하는 "테크닉이 좋다"라는 의미일 수 있다.

셋째, 흔히 감정을 잘 살린다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물론 이 세 가지는 따로 분리하기가 쉽지 않고, 물론 세 가지 모두를 갖추고 있을 때가 best일 것이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쁜 소리와 테크닉 위주로 피아노를 배웠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테크닉보다는 그 음악을 듣고 어떻게 느끼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겠느냐?"라고 자꾸 물어보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냥 선생님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가르쳐주면 편할 텐데 자꾸 내 의견을 물으니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이것은 비단 음악교육 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찾아내도록 훈련시키는 교육 방법은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큰 도전이 되었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예쁜 소리, 매끄러운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그 음악 속에 자신 만의 이야기가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동원과 김호중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사실 1회 방송을 보고는 '내가 잘못 보았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고 독일 유학파인 김호중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할지라도 겨우 13살짜리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회를 거듭할수록 이 녀석이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회 팀 미션에서 김호중과 정동원이 <희망가>를 부를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중가요를 듣고, 그것도 트로트를 듣고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한 나에게 대중음악은 관심 밖이었다.

동화보다는 문학 작품이 재미있고, 덧셈, 뺄셈보다는 미적분이 재미있듯이 대중음악보다는 클래식 음악이 더 좋았다.

대중음악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음악>이라는 용어 자체가 어느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이라는 뜻이다.

반면 클래식 음악은 배워야 알 수 있는 음악이기에 누구나 쉽게 즐길 수는 없다.

하지만 일단 알게 되면 그 깊은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바흐의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브람스의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려보기는 했지만 트로트를 듣고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60이 다 되어 깨달은 것이 단순해 보이는 음악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한 가지 이야기만 한다 할지라도 그 울림이 베토벤 9번 교향곡만큼이나 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13살짜리 아이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또다시 오래된 심리학의 논제인 nature와 nurture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젊었을 때는 nurture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nature가 더 지배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내 삶에 대한 변명이 아니고, 어떻게 인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잠언 22장 6절에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나와 있다.

전에는 이것을 단순히 신앙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Amplified Bible에 보면 "Train up a child in the way he should go (and keeping with his individual gift or bent)" 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

성경에서도 적성이나 은사에 맞게 교육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 교육의 목표가 못하는 것을 잘하도록 하는 것이 되기 십상인데 그것보다는 잘하는 것을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을까?

또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정동원은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그리고 노래 속에 담을 이야기가 많은 아이이다.

이것은 꼭 경험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느낄 수 있고 얼마나 풀어낼 수 있는지 감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정동원이 한 때의 천재로 끝나버리지 않고 변성기를 잘 넘긴 후 좋은 교육을 받아서 깊이 묻혀있는 이야기까지도 다 풀어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마지막으로, "괴물"이라는 감탄(?)을 받은 김호중을 보며 클래식 음악계의 현실이 생각나 씁쓸하였다.

클래식 음악을 공부한 김호중이 왜 <미스터 트롯>에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교수가 되지 않는 한 연주 활동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클래식 음악계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분야건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 물질을 투자해야 하지만 클래식 음악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정말로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성악은 좀 예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투자를 해서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는 서울대 음대를 나오고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더라도 교수가 되지 못하면 연주자 생활로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없다.

뮤지컬이나 대중음악 가수들의 콘서트에는 몇 십만 원씩 하는 티켓을 사서 가면서 클래식 음악회에는 공짜표를 구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이 하루빨리 바뀌었으면 좋겠다.

하긴 클래식 음악 자체가 대중음악이 아니니 대중의 호응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옛날처럼 후원자를 두어야 하나? ㅠㅠ

몇몇 대표적인 트로트 가수들이 행사에서 노래 세 곡 부르는 비용이 3,000만 원 대라고 한다.

그러니 아리아에 훨씬 더 어울리는 목소리지만 김호중이 트로트를 한다고 해도 어찌 비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서른이면 아직은 꿈을 꿀 수 있는 나이인데. . .

 

* <미스터 트롯> 7회 팀미션 "패밀리가 떴다"의 <희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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