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14년 10월 28일 화요일 (맑음)
산행코스: 박달나무 쉼터 ~ 창암 ~ 대간령 ~ 신선봉 ~ 상봉 ~ 샘터 ~ 성인대 ~ 화암사
산행거리: 대간 5.2km + 접속 9.8km = 15km
산행시간: 10:15 ~ 17:50
등산지도:
대간 2차를 다녀왔다.
2주 전 대간 1차를 하며 가을 숲이 너무 황홀하였기 때문에 2주 후 모습은 어떨지 무척 기대가 되었다.
그 아름다움이 여전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릴 기다릴까?
정답은 후자였다.
처음에는 실망하였지만 곧 산은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나를 매혹시켰다.
박달나무 쉼터에서 내려 창암 계곡으로 갔다.
2주 전 허벅지까지 차오르던 위협적인 계곡물은 사라지고 이번에는 쉽게 길을 내주었다.
계곡을 건너 바로 대간령까지 이어지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숲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가을 숲의 마법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찬란하던 금빛 나뭇잎들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신발을 벗고 건너야 했던 차디찬 계곡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가 2주 전 나를 그렇게 설레게 했던 숲인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실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또 다른 숲의 마법이 시작되고 있었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은 자유로움에 한껏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은빛 옷을 벗은 억새들은 한층 차분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주 전의 숲이 성숙할 대로 성숙한 자의 풍요로운 아름다움이라면 오늘 숲은 세상을 관조하는 나이 든 자의 지혜가 느껴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이런 숲은 나의 어리석음까지도 다 받아줄 것만 같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줄 것 같았다.
문득 나는 인생의 어느 계절을 걷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나 여름은 아닐 테고 가을이라면 그래도 2주 전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지혜로움보다 아름다움이 내 몫이고 싶다.
물론 겸비할 수 있다며 금상첨화이겠지만.
이 나무에 말 걸고 저 개울에 인사하며 대간령까지 올라갔다.
다들 뭐가 그렇게 급한지 앞서 간 사람들은 꽁무니도 안 보인다.
덕분에 난 오늘도 후미를 책임졌다. ㅋㅋ
다행히 후미를 맡은 보병궁 대장님도 사진을 찍느라 그런 날 재촉하지 않으셨다.
대간령
대간령에서 선두팀과 합류하여 신선봉 방향으로 올라갔다.
초반에는 꽤 심한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잎사귀를 떨어낸 나무들이 햇빛을 그대로 통과시켜서 해를 향해 올라가는 길은 얼굴이 따가워 고개를 푹 숙인 채 갈 수밖에 없었다.
저절로 겸손해지는 길이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한숨 돌리려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보니 동해가 내려다보였다.
햇볕은 따갑지만 시원한 동해가 함께 해줘서 다시 힘을 내어 올라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철없는 진달래도 만났다.
뭐가 그리 급해 벌써 나왔니?
뭐든지 다 때가 있는 법인데.
사랑할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고, 성공할 때가 있고 실패할 때가 있고, 나아가야 할 때가 있고 멈춰 서야 할 때가 있고.
때를 거슬러 움직이면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안다.
그런데 이 철없는 진달래는 누굴 만나려고 이 가을에 나왔나?
곧 찬바람 불고 맥없이 스러질 텐데.
너무 빨리 이루려고 하지 말자.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세상은 결과로 말하지만 하나님은 과정을 보신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충실했다면, 성장할 수 있었다면 그걸로 된 거다.
In his time He makes all things beautiful!
중간에 멋진 무명봉도 만났다.
남자들은 벌벌, 여자들은 훨훨. ㅎ
드디어 신선봉에 도착.
신선봉, 여긴 금강산 봉우리라지?
난 오늘 금강산에 온 거야!
신선봉 정상
신선봉 밑에서 점심을 먹고 상봉으로 향하였다.
급경사 내리막을 지나 화암재를 거처 상봉으로 갔다.
짧은 암릉 구간.
오! 바위
난 바위 타는 게 좋아.^^
상봉에선 앳된 군인들이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상봉 정상
군인 아저씨에서 위문편지 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군인들이 어쩜 그렇게 다들 어리고 귀여워 보이는지.
저 아이들에게 국방을 맡겨도 되는 건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만큼 내가 나이 먹었다는 뜻이겠지.
상봉에서 너덜바위를 지나 샘터까지 내려갔다.
원래 오늘 계획은 상봉에서 샘터까지 가서는 지킴이들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미시령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두 시간 정도 산에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대장님이 계획을 수정하셨다.
대간 1km 더 밟자고 산에서 웅크리고 앉아 시간 보내기보다는 화암사 쪽으로 내려가자고 하신다.
그래서 샘터에서 선인재로 향하였다.
내려가는 길에 좌우로 너무 풍경이 멋있어서 정말 넋 놓고 보았다.
그러다 넘어졌다.
집에 와서 보니 어깨랑 무릎이 까지고 멍이 들어 있었다.
몇 주 전 산행하다 왼쪽 발을 접질렸는데 그 이후로 계속 왼쪽 발이 힘이 없고 부실하다.
오늘도 넘어지면서 왼쪽으로 넘어져 왼쪽만 다쳤다.
병원에서는 쉬라고 하지만 철이 철인만큼 쉴 수가 없지, 아무렴.
다음부터는 구경할 때는 완전히 멈춰서 보고 걸을 때는 앞만 보고 가도록 하자.
멀리 장엄한 울산바위가 서 있었다.
햇빛을 받은 울산바위의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닌지 볼을 꼬집어보고 싶었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이후 무척 가파른 내리막이 계속되었다.
난 이런 길 정말 싫어. ㅠㅠ
대장님이 분명 걷기 좋은 둘레길이 나온다고 했는데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투덜투덜 대며 내려가다 보니 멋진 성인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인대/신선대 정상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둘레길.
앗, 아닌가?
다시 급경사 내리막.
다리가 풀리려고 해 온 정신을 집중하며 내려가다 보니 올라갈 때 보다 더 열이 났다.
가뜩이나 땀이 안 나는 사람이 열을 내다보니 찜질방에 들어와 있는 기분.
처음부터 끝가지 완벽하게 후미를 지키며 화암사로 내려가니 5시 50분이었다.
이곳은 아직 단풍이 예쁘게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어두워진 데다 사진기에 배터리도 없어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대장님과 먼저 하산한 분들이 족탕을 하고 있었다.
할 건 해줘야지.
나도 간략하게 개울에 발을 담그고.
오늘 산행은 대간의 맛을 조금 알게 해 주었다.
거의 8시간 산행.
최장 산행시간이 여섯 시간인 나에게는 힘든 산행이었다.
샘터 이후부터는 무슨 정신으로 내려갔는지 모르겠다.
내려가서는 기운이 없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거의 유체이탈 할 뻔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나?
계속 이렇게 얼굴에 철판 깔고 후미를 지켜야 하나?
선두는 4시에 내려왔다는데.
대장님은 괜찮다고 하시지만 남에게 폐 끼치기 싫은 나는 마음이 불편하다.ㅠㅠ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오늘 하루 또 다른 행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를 위해 함께 후미를 지켜주신 후미 대장님과 산우들에게도 감사를 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