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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2015.01.27 백두대간 8차: 진고개 ~ 노인봉 ~ 소황병산 ~ 바람의 언덕 ~ 삼양목장

산행일시: 2015년 1월 27일 화요일 (맑은 후 흐려져 눈)
산행코스: 진고개 ~ 노인봉 ~ 소황병산 ~ 동해 전망대 ~ 바람의 언덕 ~ 삼양목장
산행거리: 대간 15.2km + 접속 4.8km = 20km
산행시간: 09:50 ~ 18:00
등산지도:

 

하염없이 눈길을 걸었다.

오늘 산행은 딱 이거다.

밀가루 같이 보슬보슬한 눈길을 하루 종일 무념무상으로 걷고 또 걸었다.

가시는 걸음걸음 쌓인 그 눈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눈을 원 없이 밟아본 날이다.

버스는 진고개에 대간꾼들을 풀어놓았다.

 

진고개

날씨는 쾌청했지만 오후에 풍속이 9m라는 예보가 있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출발하였다.

진고개에서 노인봉까지 3.9km만 가고 나면 나머지는 쉬운 길이라고 산행 시간을 6시간 30분 주셨는데 아무리 그래도 20km에 6시간 30분은 아니지 싶다.

만약 예보대로 바람이라도 강하게 불면 훨씬 더 늦어질 텐데.

진고개를 올라서면 고위평탄면이 나온다.

고위평탄면이란 오랜 세월 침식을 받아 기복이 작아진 평탄 지형이 신생대 제3기의 경동성 요곡 운동으로 융기하여 형성된 고도 500m 이상의 높은 땅이라는데 삼양목장까지 앞으로 걷게 될 지역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위평탄면이란다.

 

이후 한참 계단을 오르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가벼운 산길이다.

눈은 잘 다져져 있어 걷기 좋지만 스틱으로 옆을 찔러보니 쌓여있는 눈의 깊이가 만만치 않다.

함께 가는 대간 길이 좋기도 하지만 옆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들이 영 반갑지가 않을 때가 있다.

조용히 걷고 싶은데, 속세(?)를 피해 산으로 왔는데, 여기서조차 시끌벅적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한 번 내가 싫어하는 소리가 귀에 꽂히면 계속 그 소리만 들리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참다 참다 앞으로 내달았다.

나도 좀 무던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사람이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니 이해해주세요. ㅠㅠ

노인봉 삼거리로 가기 전에 목책이 있는 아름다운 산길이 나온다.

 

이곳에 설화나 상고대가 있었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노인봉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300m 가면 노인봉이다.

 

노인봉 정상

노인봉에서 사진을 찍고 다시 삼거리로 돌아가 노인봉 대피소로 갔다.

대피소를 지나 화장실 옆 대간 길로 들어선다.

고위평탄면이라는 말 그대로 작은 오르내림은 있지만 거의 평지를 걷듯 순한 등로가 계속된다.

하지만 깊이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진다.

러셀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선답자의 발자국 모양대로 따라가려니 속도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발자국이 움푹 들어가 있어 다리를 높이 들어 옮겨야 하니 숏다리 misscat은 앞으로 꽤나 지치게 될 것 같다.

 

산행을 시작할 때 푸르던 하늘은 이내 흐려지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산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내렸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얼마나 갔을까?

가파른 오르막이 나타나는가 했더니 갑자기 넓디넓은 평지가 나타났다.

 

여기부터 삼양목장이고 저 끝에 보이는 언덕이 소황병산이다.

 

소황병산 정상

이곳에 있는 <백두대간불법산행통제초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요새 규제 철폐를 외치던데 이런 것 좀 어떻게 안 될까?

차라리 1주일에 몇 번 요일을 정해서 정해진 인원만큼만 입장료를 받고 산행을 허가해주던지 하는 방법은 어떨까?

애먼 사람들 불법자 만들지 말고 그게 윈윈 하는 방법일 거 같은데.

눈발은 점점 굵어지고 주위는 운무에 휩싸이며 내가 좋아하는 명상의 숲으로 변한다.

이후 금지구간이 끝나는 5km 이상 이 아름다운 숲을 범법자가 되어 걷고 또 걷는다.

마음이 편치 않은 건 그뿐만이 아니다.

모레가 대학입시 발표 날이다.

이번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더 낮추실 것인지.

사실 인생을 길게 보면 대학입시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쓸데없이 가방 끈이 긴 우리 가족에게는 "학벌"이라는 것이 꽤 민감한 문제이다.

아무리 엘리트 의식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 가족에게 겸손을 가르쳐주셨다.

어떠한 길로 인도하시던지 감사하고자 한다.

나보다 내 자녀를 더 잘 아시는 주님, 나보다 내 자녀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 완전하고 실수가 없으신 그 주님을 신뢰하자.

나를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모르는 백색의 공간 속에서 "믿음"이 무엇인지 배우길 기대하며.

 

갈수록 눈은 더 많이 쌓여 있었다.

무릎까지, 바람에 쓸려 눈이 쌓인 곳은 허리까지 빠진다.

켜켜이 쌓여있는 눈은 살짝 얼어있지만 어느 순간 발밑이 꺼지면 쑥 떨어진다.

산길로 가다, 삼양목장 길로 가다 드디어 금지구역을 벗어났다.

여름이면 야생화가 만발하고 푸르렀을 이곳이 황야처럼 보인다.

 

어스름 속에서 거대한 풍력발전기 날개 하나가 나타났다.

조금 더 가니 날개가 다 보인다.

예보와 달리 바람이 불지 않는 것 같은데 날개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마의 14km가 다 되어 가는지 몸이 지쳐간다.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동해 전망대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전망대에서 조망은 꿈도 못 꾸고.

 

                 동해 전망대

잘하면 <바람의 언덕>까지 버스가 올라와있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버스가 안보였다.

체인을 해도 버스가 올라오기는 힘들겠다.

할 수 없이 4.8km를 걸어 내려가야 한다.

4시 30분까지 내려오라고 했는데 시간은 이미 5시 20분.

그러지 않아도 배꼽시계가 알람을 울려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약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내려가는데 다리부터 시작하여 엉덩이, 허리까지 아파온다.

오늘도 내 힘으로 내려가긴 틀렸네. ㅠㅠ

길가의 건초더미는 나를 향해 예쁘게 웃는데 난 웃을 수가 없었다.

 

걷다 보면 언젠가는 끝나겠지.

그렇게 힘든데 왜 산에 가냐고?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산이 좋아서, 나를 다독여주는 산이 좋아서.

젖 먹던 힘을 짜내어 걸어가고 있는데 차가 한 대 내려왔다.

아! 저거...

함께 걷던 산우님이 소리 질러 차를 세웠다.

나머지 2km는 차를 타고 내려왔다.

고맙습니다, 기사님.^^

6시 삼양목장 매표소에 도착하였다.

 

시와 같은 풍경, 시와 같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