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14년 12월 17일 수요일 (눈)
산행코스: 장현리 ~ 오서산 자연휴양림 ~ 월정사 ~ 중계탑 ~ 오서산 ~ 공덕고개 삼거리 ~ 장현리
산행거리: 12km
산행시간: 11:35 ~ 17:30
등산지도:
계속해서 중부지방에 눈이 많이 내렸다는 소식에 은근히 걱정이 된다.
산행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들머리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가 걱정된다.
오늘 타고 가기로 한 산우님의 차가 제네시스이기 때문이다.
후륜구동이라는 말이다!
후륜구동이 눈길에서는 완전 잼병인데...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보령으로 들어서자 눈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조심조심 운전을 하며 내비가 알려주는 대로 성연저수지를 지나고 장현저수지 쪽으로 들어섰다.
제설이 제대로 안된 도로는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급기야는 3~4도 경사 밖에 안 되는 곳에서 차가 영 올라가지를 못하고 미끄러지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은 운전대를 잡고 나머지 사람들은 내려서 차를 잡고 후진으로 내려갔다.
결국 근처 농가 옆에 차를 세워놓고 걸어가게 되었다.
오늘 산행하는 오서산은 동행하는 산우님이 블랙야크 100 명산 중 마지막으로 인증하게 될 산이다.
오서산은 작년 가을 억새가 한창일 때 왔었지만 지인의 100 명산 완등을 축하해주기 위해 같이 온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눈이 많이 쌓여있고 춥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장 쉽고 빠르게 오를 수 있는 코스를 잡았다.
바로 오서산 자연휴양림에서 올라가는 코스이다.
여기서부터 올라가면 고도차가 400여 미터라고 한다.
반면 상담주차장에서 올라가게 되면 700여 미터이다.
좀 쉽게 산행을 하려고 이곳에서 산행을 시작하기로 한 건데 눈 때문에 오히려 800m나 올라가게 되었다.ㅠㅠ
장현리에서 오서산 자연휴양림까지 3.2km를 걸어갔다.
휴양림 가기 직전 멋진 화장실이 있길래 산행 준비도 할 겸 들리려 했더니 문을 잠가놓았다.
옆에 있는 안내소에서 사람이 나와 동절기에는 폐쇄한다고 한다.
안내소 안에서 산행 준비를 좀 할 수 있는지 물어보니 안 된다고 한다.
야박하기는...
충청도 인심이 안 그런 것 같던데 추운 겨울날 연약한 여인네가 밖에서 덜덜 떨며 산행 준비하는 것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그 사람, 정~말 대단하다.
아님, 내가 전혀 연약해보이지 않았나?
어쨌든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고 패딩 재킷은 배낭에 쑤셔 넣고 씩씩하게 자연휴양림을 향해 걸어갔다.
길가 잡목 위 눈이 목화솜처럼 보인다.
바위에는 고드름이 달려있지만
명대계곡에선 힘차게 물이 흘러내린다.
휴양림 매표소 왼쪽에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매표소를 지나 명대정과 월정사라는 조금만 절까지는 계곡길이다.
월정사 약수터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계속 걸어갔다.
이후 임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휴양림 산책로이기 때문에 길이 넓고 아주 좋다.
임도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슬슬 경사도가 높아지며 위로 올라갈수록 눈이 점점 깊이 쌓여있었다.
그래도 선답자의 발자국이 있어 큰 고생 안 하고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조금 올라가다 보니 바로 그 선답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 혼자서는 힘들어서 도저히 러셀을 못하겠다며 포기하고 내려가는 길이라고 한다.
인사를 하고 헤어져 우리는 계속 올라갔다.
<정상 0.7km> 이정표에서부터는 코가 땅에 닿을 정도의 경사도를 보인다.
처음에는 종아리까지 빠지던 눈길이 점점 허벅지까지, 허리까지 빠진다.
급경사의 오르막을 러셀을 하며 올라가려니 진행이 더디다.
게다가 어디가 길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무작정 위를 향해 올라가야 했다.
동행한 산우들은 은근 걱정이 되는 눈치인데 난 신나기만 하다.
완전히 눈 속에 갇힌 느낌에 짜릿함이 느껴진다.
주위는 온통 설국이다.
마치 <나니아>에 온 것 같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에 내 발자취를 내며 걸어가는 게 너무 행복해서 힘든 줄도 모르겠다.
문득 '나도 미쳤지'하는 생각이 든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누가 이렇게 추운 날, 이렇게 눈이 많이 쌓인 산에 간다고 하면 정신 나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내가 그러고 있다니!
그러면서도 그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기쁘고 신이 나다니!
역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제는 내 욕심을 내려놓고 아이들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지켜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급경사 계단을 올라 조금 걸어가니 통신중계탑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령 쪽 정상석이 나타났다.
인증 사진을 찍고 오서정을 향해 나아갔다.
오서산 정상
원래 계획은 홍성 쪽 정상석을 찍고 오서정에 가서 점심을 먹는 거였다.
그런데 능선 위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소백산이나 덕유산을 산행했을 때보다 바람이 더 센 것 같다.
바람으로 인해 상고대가 제대로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상고대를 보게 되리라고는 기대도 안 하고 왔는데 마치 로또에 당첨된 것 같다.
지난 가을 찬란했던 억새는 겨울잠을 자듯 누워있다.
경치는 끝내주게 멋있는데 눈보라가 쳐서 시계가 5m도 안 되는 것 같았다.
공덕고개 삼거리에서 오서정 쪽으로 가다가 끝내 헤매게 되었다.
날씨만 좋다면 능선길이 훤히 보일 텐데 도저히 앞이 안보이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되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다시 정상석을 지나고 중계탑을 지나 휴양림으로 내려갔다.
역시 급경사 내리막이지만 우리가 올라온 발자취가 남아있어서 비교적 수월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마치 스키를 타듯이 미끄러지며 내려가는데 그나마 좀 내려가다 보니 바람이 눈을 휘몰고 가 길이 안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나게 미끄러지며 내려갔다.
워낙 눈이 많이 쌓여서 넘어져도 전혀 아프지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고 일부러 눈에서 넘어지며 깔깔거렸다.
다시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다.
내려가기가 아쉽다.
(우리가 미끄러져 내려간 길)
난 더 있다 가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은 벌써 서울 올라갈 길을 걱정한다.
차가 미끄러지고 못 가게 될까 봐 걱정들을 한다.
난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데.
정 안되면 견인차 불러서 고속도로까지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근처 카센터에 연락해서 체인을 갔다 달라고 해도 되는 거고.
자연휴양림에 있는 명대정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비닐커버를 둘러쓰고 앉아 준비해온 부대찌개를 먹었다.
오메, 와 이리 맛있노?
지인의 100 명산 완등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와 샴페인, 그리고 축가도 준비하였다.
역시 난 준비의 여왕인 거 같다.ㅋㅋㅋ
배불리 점심을 먹고 다시 장현리까지 걸어 나갔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차는 무사히 굴러가 주었다.
오늘은 실제 산행 거리(5.6km)보다 접속 구간(6.4km)이 더 긴 산행이었다.
쉽게 산행하려고 머리를 쓰다 오히려 더 힘들게 산행을 하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멋진 설경을 봤으니 조금도 아깝지 않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