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16년 5월 10일 화요일 (비)
산행코스: 늘재 ~ 청화산 ~ 갓바위재 ~ 조항산 ~ 고모치 ~ 밀재 ~ 대야산 주차장
산행거리: 대간 10.6km + 접속 4.2km = 14.8km
산행시간: 11:50 ~ 19:05
등산지도:
비가 온 뒤 산행하는 것은 좋지만 비올 때 산행하는 것은 정말 싫다.
하지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도 대간 산행은 어김없이 진행된다.
버스 기사님이 알바를 하며 우복동천 길을 빙빙 도는 바람에 12시가 다 되어 늘재에 도착하였다.
늘재에는 청화산 쪽으로는 커다란 백두대간 표지석이 있으며, 길 건너편 속리산 쪽으로는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 표시판이 있다.
늘재
백두대간 표지석 앞에서 우비를 입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백두대간 표지석 뒤편으로는 백두대간 성황당 유래비와 성황당이 있었다.
이곳에서 청화산까지는 2.4km 정도이다.
성황당 왼쪽에 있는 등산로로 1km 정도 올라가면 정국기원단이 나온다.
정국기원단까지 가는 길은 아름다운 숲길이었다.
비가 와서 더욱 아름다운 그런 숲길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참 좋았는데.
비가 와서 더 분위기 있다고 멋도 모르고 좋아했는데.
정국기원단
정국기원단을 지나면 슬슬 경사도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힘들게 올라가는 등로 양쪽으로는 야생화가 많이 피어있었다.
불과 한 달 전 그렇게 아름다웠던 각시붓꽃은 쇠락하고 있었으며 대신 둥굴레 꽃이 지면을 점령하고 있었다.
둥굴레 꽃
꽃이 피고 지듯 우리 인생살이도 그러한 것을 기억하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베드로전서 1: 24~25)
슬슬 길이 험해지며 밧줄 구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날씨가 좋으면 조망이 끝내줄 텐데 비가 와서 꽝이다.
헬기장을 지나서 계속 걸어가는데 점심때가 지나 체력이 고갈되기 시작한지라 몇 번이고 쉬었다 가길 반복하였다.
아이고, 힘들어.
아이고, 배고파.
아이고, 죽겠네.
힘들게 청화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청화산 정상
청화산에서 조항산까지는 4.2km 란다.
산 아래에는 이미 철쭉이 지고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아직 봉오리들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연분홍색 철쭉이 진분홍색 산철쭉보다 더 예쁘다.
연분홍색 꽃이 마치 새색시 같다.
특히나 꽃봉오리는 순수하면서 erotic 하기도 하다.
시루봉 갈림길에 이르러 늦은 점심을 먹었다.
비는 전혀 그칠 기미가 안보였다.
비를 맞으며 서서 빵 하나를 먹고는 조항산 쪽으로 갔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우복동천 길로서 시루봉으로 가게 된다.
백두대간 길은 좌회전하여 조항산 쪽으로 가야 한다.
이정표가 분명하니 알바할 염려는 없다.
갓바위재까지 가는 길에는 암릉이 나타난다.
군데군데 조망터가 있지만 비가 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길이나 인생길이나 이렇게 막막하게 가야 할 때가 있다.
2014년 2월에 왔을 때 조망을 많이 즐겼으니까 오늘은 안 봐도 괜찮다.
하지만 비는 좀 그쳐줬으면 좋겠다.
조망 대신 야생화로 위안을 삼으며 갓바위재까지 갔다.
붉은병꽃
벌깨덩굴
민백미꽃
등로 한가운데 청개구리 한 마리가 앉아서 사람들이 지나가도 피하지 않은 채 온몸으로 비를 즐기고 있었다.
갓바위재에는 아무런 이정표도 없이 리본들만 나부끼고 있었다.
이곳에서 의상저수지로 내려갈 수 있다.
다시 조항산까지 암릉을 오르내리며 갔다.
예전에 왔을 때는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갔던 기억이 난다.
그간 산행 실력이 많이 늘긴 늘었나 보다.
암릉을 따라가는 길에 조망이 무척 좋았는데 오늘은 빗속에 무념무상으로 걷는다.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조항산 정상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조항산 정상
또다시 체력이 고갈되어 이곳에서 빵 한 개와 제인 언니가 준 찹쌀떡을 먹었다.
조항산 정상에서 500m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도 의상저수지로 내려갈 수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의상저수지로 내려갔는데 저수지로 내려가기 전의 1km 이상이 상당히 가팔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모치는 이곳에서 900m라고 적혀있다.
600m가량 상당히 가파르게 내려가야 한다.
비에 젖은 길이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고모치에서 10m 거리에 고모샘이 있단다.
고모치
날이 더울 때는 요긴한 식수처가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가져온 물도 버릴 판이다.
우비를 입고 장갑 위에 비닐장갑까지 꼈건만 우비가 자꾸 말려 올라가 속옷까지 다 젖고 장갑도 다 젖어서 무척이나 추웠다.
이러다 저체온증에 걸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게다가 고모치에서 올라가는 길은 왜 그리 가파른지.
백두대간이고 뭐고 그냥 산행 포기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더 이상 못 가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그냥 주저앉아서 울고 싶다.
누가 나 업고 내려가 줬으면 정말 좋겠다. ㅠㅠ
체력도 안 되는 내가 왜 대간 산행을 시작했던지 후회가 된다.
도대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러는 건지.
더욱이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무슨 정성이 뻗쳐서 이 비를 맞고 덜덜 떨며 산행을 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미쳐도 크게 미쳤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를 하고 투덜거린들 뾰족한 수가 없고 계속 갈 수밖에 없다. ㅠㅠ
내가 대간 산행을 통해 얻은 건 바로 그거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고 싶어도, 그냥 주저앉고 싶어도 그저 끝까지 가야 한다는 것.
너무 힘들어서 대간의 "대"자도 듣기 싫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신기하게 산을 내려가고 나면 힘들었던 걸 잊어버린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힘든 길도 있고 평탄한 길도 있고, 날씨가 좋을 때도 있고 궂을 때도 있고, 멋진 조망에 감탄할 때도 있고 땅만 쳐다보며 가야 할 때도 있고.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내면, 묵묵히 걸어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바라건대 앞으로의 내 삶은 순탄한 이런 길이었으면 좋겠다.
기진맥진하여 고모치에서 올라간 첫 번째 봉우리에서 또다시 간식을 먹었다.
물에 빠진 생쥐마냥 흠뻑 젖고 스패츠를 했음에도 젖은 바지를 타고 흘러내린 물로 양말도 다 젖어 심히 춥고 힘들었지만, 고맙게도 고모치에서 밀재 가는 길은 야생화 천국이었다.
둥굴레꽃, 각시둥굴레, 민백미꽃, 붉은병꽃, 졸방제비꽃, 쥐오줌풀, 은방울꽃, 애기나리, 큰애기나리, 산괴불주머니, 매화말발도리, 고추나무꽃 등 등로 양편이 온통 꽃밭이었다.
각시둥굴레
졸방제비꽃
쥐오줌풀
은방울꽃
풀솜대
사실 비가 와서 숲은 더 아름다웠다.
옷이 젖지만 않았더라면, 양말이 젖지만 않았더라면, 춥지만 않았더라면 참으로 좋았을 것 같다.
날씨가 좋았더라면 야생화 찍느라 시간이 배로 걸렸을 것이지만 오늘은 비가 와서 눈인사만 하며 그냥 지나쳤다.
고모치에서 봉우리 두 개를 넘고 나면 집채만 한 바위들이 나타나서 대야산이 가까웠음을 알려준다.
드디어 밀재에 도착하였다.
밀재
늘재에서 밀재까지 10.6km를 6시간 걸려서 갔다.
시속 2km도 못 걸은 것이다. ㅠㅠ
하지만 이제부터는 어렵지 않다는 걸 아니 갑자기 기운이 난다.
다시 한 번 간식으로 체력을 보충해주고 부지런히 용추계곡으로 내려갔다.
지난번에 봤으니까 월영대 pass, 용추폭포도 pass.
오늘도 꼴찌로 대야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선두 그룹은 5시 30분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별로 차이 안 나네. ㅎㅎ
버스에 올라 배낭을 여니 배낭 속이 온통 물 천지다.
레인커버를 했는데도 배낭이 흠뻑 물에 젖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젖으며 산행하긴 처음인 것 같다.
이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어라, 힘들었던 걸 벌써 잊었나?
항상 이렇다니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