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고 며칠 전 친구들을 만났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건강과 죽음이 대화의 주제가 되어버렸다.
아빠는 오래전에 가셨지만 아깝다면 아까운 나이에 연명 치료를 거부하셨던 그 용기가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아쉬움은 많이 남기셨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갈 인생, 가족들 많이 고생시키지 않고 깨끗하게 가셨던 것 같다.
그래서 더 고맙고, 더 그립고 그렇다.
가신 지 15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아빠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남편으로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아빠로서는, 적어도 나에게는 최고의 아빠였다.
요즘 병실에 계신 시아버님을 보며 또다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디까지가 환자를 위한 것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라면 병실에서 죽기는 싫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익숙하고 정든 내 집에서 죽고 싶다.
그리고 쓸데없는 연명 치료는 정말 하고 싶지 않다.
호스 꽂아 음식 공급하고, 수시로 suction으로 가래 뽑아내고, 대소변 내 의지대로 하지 못하고, 그러면서 오래 살고 싶지는 않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큰아버지, 큰이모, 외삼촌, 그리고 최근의 작은이모까지 모두 연명 치료 안 하시고 돌아가셨다.
본인의 의지도 중요하겠지만 주위 사람들도 동의해주어야 가능한 일이겠다.
환자가 아무리 원한다 해도 주위 사람들이 퇴원을 안 시켜주면 어쩔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환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뒤에 남을 사람들을 위해서 연명 치료를 하는 건 아닐까?
그들이 나중에 후회하기 않기 위해서.
그래도 내가 이만큼 해드렸다, 이만큼 효도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런 것도 필요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환자는?
그 고통을 온전히 감내해야하는 환자는?
물론 살고 싶어 하는 환자에게는 그것이 불필요한 치료라도 해드릴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산 사람 편하자고 죽어가는 사람 괴롭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먼저 가는 게 미안해서 그 정도 고통은 흔쾌히 감수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다.
나한테는 절대 그러지 말라고 유서라도 미리 작성해놓아야겠다.
바라건대 시아버님이 오래 고통 받지 않고 품위를 유지한 채 편안하게 가셨으면 좋겠다.
이제 곧 2015년도 간다.
언제 가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당황하지 않도록 준비하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