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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 <눈물 한 방울: 이어령의 마지막 노트 2019 - 2022>

지은이: 이어령


하얀색 바탕에 음각으로 되어있는 책 표지가 제목과 잘 어울리는 책이다.

 

 

이 책은 가희 이 시대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고 이어령 선생님이 2019년 10월에서 별세하기 한 달 전인 2022년 1월 23일 사이에 쓴 글들을 모은 유고집이다.
왜 하필이면 눈물일까?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주기 때문이란다.
그는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만이 이 시대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주제에 관한 일련 된 글들이 있다기보다는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메모한 습작 형태의 글들로 구성되어있다.
본디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특성으로서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에 관한 글을 쓰려고 서문을 써놓았던 거 같지만 이 거인도 병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목숨

아직은 말할 수 있어
쉰 목소리로
꽃을 꽃이라 부를 수 있고
펜을 펜이라 부를 수 있다.

어느 날 영영 소리 낼 수 없을 때
꽃은 더 멀어질지 가까워질지
펜은 내 손에서 잡혀 있을지 떨어져 있을지
알 수 없다.

목을 더듬는다. 소리는 없어도
목청은 사라졌어도 숨은 쉴 수 있어.
목 속에 숨이 목숨으로 있을 때,
세상은 멀리 있는지 더 가까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죽음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데
국어 시험 치듯. 다 풀 수 있었는데...

2020.1.21


대한민국의 지성이라 불리던 그도 죽음 앞에서 알 수 없다고 말한다.
2020년 중반부터는 죽음을 향해 가며 과거를 회상하는 글들이 많이 등장한다.
때로는 떠남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글의 수가 적어지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그의 "눈물 한 방울"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우리 사랑해요
바람이 부는 동안
머리칼을 날리며
모래밭을 달려요

우리 사랑해요
햇빛이 있는 동안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이야기해요

우리 사랑해요
새들이 우는 동안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함께 노래해요

바람이 멎고 햇빛이 지고
새들이 울지 않으면
그때 헤어져요

2021.06.28


하지만 누구나 가야 할 길.
언젠가 나도 가야 할 길.


내가 죽는 날은
맑게 개인 날이었으면 좋겠다
하늘은 파랗고 땅은 황토색 그리고 산들은 바다처럼 출렁거렸으면 좋겠다.
그늘 하나 없는 대낮이었으면 좋겠다.
밤하늘의 별들이 아니라 풀섶의 풀꽃처럼
빨간 점들이 빛나면 좋겠다.
바람은 흐느끼지 않고 강물은 멈춰 호수가 되거라.
떠나리라. 내 영혼은
그렇게 맑게 개인 날에.

2020.9.12


바라시던 대로 맑게 갠 날 세상을 떠나진 못하신 것 같다.
하지만 나도 눈이 부시도록 화창한 날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그토록 다 보고 싶어했던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뒤로 하고 이보다 더 아름다울 천국을 기대하며 기쁜 마음으로 떠나고 싶다.
이왕이면 장미가 만발한 계절에 떠나 내 장례식장은 온통 분홍색 장미로 장식해줬으면 좋겠다.
문상객들도 칙칙한 검은 옷이 아니라 제일 예쁜 옷들을 입고 와서 천국 가는 나를 기쁜 마음으로 배웅해주면 좋겠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