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Orhan Pamuk
예전에 파묵의 <순수박물관>을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읽은 후 노벨상 수상자인 이 작가의 수준을 나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의 책을 또 골랐는지..
게다가 이번에는 763쪽에 이르는, 질리는 두께의 장편이다.
책을 빌려와서는 방 한 구석에 고이 모셔놓았다가 용기를 내어 읽었다.
<페스트의 밤>은 1901년 페스트가 창궐했던 오스만 제국 치하의 민게르 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2017년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 이 소설은 코비드 사태를 예견했다는 걸로 유명세를 타기도 하였다.
소설 속의 거리두기, 집합금지, 격리, 소독, 마스크, 방수 판초 등의 방역 모습이나 불가항력의 전염병이 몰려올 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등은 우리가 코비드 상황 하에서 경험한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소설은 페스트 상황에 대한 소설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오스만 제국이 무너져갈 무렵 민게르 섬에서 일어난 민족주의를 둘러싼 내, 외부의 복잡한 상황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뜻밖의 상황들이 연이어 나타나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연 개인의 의지라는 것이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일까?
개인의 역사이건, 국가나 세계의 역사이건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는 걸 보며 미천한 피조물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어쩌면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계획신봉주의자의 틀을 못 벗어나는 나는 도대체 책을 왜 읽는 것일까?
우려와는 달리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