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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2014.12.23 백두대간 6차: 구룡령 ~ 약수산 ~ 응복산 ~ 만월봉 ~ 신배령 ~ 내면매표소

산행일시: 2014년 12월 23일 화요일 (맑은 후 흐림)
산행코스: 구룡령 ~ 약수산 ~ 응복산 ~ 만월봉 ~ 신배령 ~ 조개골 ~ 오대산 내면매표소
산행거리: 대간 11.1km + 접속 6km = 17.1km
산행시간: 10:30 ~ 20:30
등산지도:

 

원래 이번 코스는 무박으로 구룡령에서 진고개까지 가는 걸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부실한 회원이 절대 무박은 못한다고 하여 반으로 잘랐다.

다시 그 부실한 회원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ㅋㅋㅋ

꼬불꼬불 멀미나는 구룡령 고갯길을 올라 구룡령 표지석 앞에 도착하였다.

이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는다는 대장님 말씀에 따라 다시 한 번 구룡령 표지석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구룡령

지난번에 왔을 때는 비가 왔었는데 오늘은 눈이 쌓여 있었다.

또 지난번 산방 기간에는 지킴이들에게 들킬까 봐 가슴 졸이며 산을 올랐었는데 이번에는 여유 있게 산행 준비를 하고 사진도 찍고 출발하였다.

초반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하지만 구룡령에서 약수산까지 1.3km 정도밖에 안되고 고도도 300여 미터만 올리면 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하다.

주말에 대간꾼들이 이곳을 다녀가지 않았을까 기대를 했었지만 러셀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었다.

세 분의 산우들이 번갈아 길을 내며 나아갔다.

보통 종아리에서 무릎 정도까지, 바람이 불어 눈이 쌓인 곳은 허벅지까지 눈이 쌓여 있기 때문에 앞에서 길을 내주어도 걷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약수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정상 표시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른 분들 블로그에 보면 지면에 정상 표시판이 있다고 했는데 눈에 파묻혀서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인증 사진을 포기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대신 구룡령 전망대라고 쓰인 곳에서 멋진 사진을 찍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

정말 이 맛에 산에 오르지 싶다.

 

약수산에서 응복산까지는 몇 차례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한다.

구룡령에서 시작할 때는 날씨가 좋았는데 점점 흐려지며 바람이 거세진다.

 

(거센 바람에 날리는 리본들)

게다가 갈수록 눈이 점점 더 많이 쌓여있어 선두가 지나갔어도 어디가 등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능선 위는 바람에 쓸린 눈이 거의 가슴팍까지 쌓여있어 러셀을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길을 내는 선두팀들이 무작정 방향만 보고 비탈에 길을 내며 나아가는 통에 나뭇가지에 옷도 긁히고 얼굴도 긁히고.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사막에 강을 만드신 하나님"처럼 수북이 쌓인 눈 위에 길을 내며 나아갔다.

점심을 먹고 응복산에 올랐다.

약수산 정상 표시판을 못 찾은 게 한이 되어 응복산에서는 눈을 50cm 이상 파헤쳐 드디어 정상 표시판을 찾았다.

나는 말로만 파고 k현민님이. ^^

 

응복산 정상

만월봉까지만 가면 그다음부터는 길이 좋다니까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그런데 아이젠을 하고 힘들게 눈길을 걸어서인지 발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동행하는 산우들의 도움으로 스트레칭과 마사지를 하다 보니 뒤로 처지게 되었다.

오늘은 눈 때문에 다른 산우들이 속도를 내지 못해서 모처럼 같이 갈 수 있었는데.ㅠㅠ

부실한 내가 걱정되어 언제나 동행해주시는 임병수운님과 K현민님이 정 안되면 신배령 가기 전에 통마름골로 내려가자고 위로를 해주신다.

나 때문에 그럴 수는 없지.

내가 혼자 내려가도록 하실 분들이 아니니 어떻게든 가야 한다.

더 쉬었다 가자는 걸 뿌리치고 다리를 쭉쭉 뻗으며 천천히 걸어보았다.

아, 하나님, 탈이 나더라도 내려가서 나도록 해주세요.

이건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요!

다른 분들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다른 분들의 산행까지 망치고 싶지 않아요. ㅠㅠ

아픈 발을 이끌고 나아갔다.

한발 한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앞으로 걸어갔다.

가다 보니 멋진 주목이 서있었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

넌 이 곳에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니?

이곳에서 얼마나 많이 계절이 바뀌는 걸 보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보았니?

잠시 바람을 피하여 주목에 기대어 서있는 동안 지나온 나의 삶이 바람처럼 눈앞에서 휙~ 지나갔다.

이 산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걸어온 나의 삶이.

하지만 오르막에서건 내리막에서건 시간은 언제나 똑같이 흘러갔다.

기쁠 때는 그 시간이 아쉬웠고 슬플 때는 그 시간이 인내를 요구했지만 시간은 정확하게 1초, 1초 흘러갔다.

결국 내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왜 이리 늦게 깨닫게 되었을까?

무언가 내가 이루어보려고 했던 것, 내 삶에 실패나 아픔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큰 교만이었는지....

지금 이 순간처럼 발이 아프면 아픈 대로 천천히 걸어가는 것, 그것이 최선임을 깨닫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끝까지 못 가면 어때? 산이 허락하는 한, 내 몸이 허락하는 한 가는 거지.' 하고 마음을 비우고 거센 바람을 헤치며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발이 괜찮아졌다.

이윽고 만월봉을 지나 신배령에 도착하였다.

 

신배령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았다.

앞으로 두 시간이면 내려가겠지.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교만한 생각인지 그때는 몰랐다.

조개골 상류 쪽은 꽝꽝 얼어있어서 계곡으로 걸어가도 괜찮을 정도였다.

 

눈 덮인 계곡 위로 어떤 동물인지 동물 발자국도 나있고.

 

우리 팀원 중에 켈리라는 이름의 보더콜리를 데리고 대간 산행을 하시는 산우님이 계신다.

개를 cage에 넣어서 버스 트렁크에 태우고 오는데 그 긴 시간 동안 개가 어떻게 어두운 트렁크 속에서 견뎌내는지 모르겠다.

전혀 지치거나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으니 신기하다.

그리고는 산에 오면 좋아라 난리다.

또 얼마나 예의가 바른 지 절대 다른 사람을 앞지르지도 않고 짖지도 않고 항상 주인 바로 앞에서 가다가 뒤돌아보고 또 가다가 뒤돌아보고 한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했더니 주인의 신호에 따라 바위에 올라가서 포즈를 취한다.

켈리, 너 이렇게 멋져도 되는 거야?

 

켈리

신배령에서 조개골로 내려가는 길은 평소에도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등로가 희미하다고 하는데 눈까지 왔으니 전혀 길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또다시 무작정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없는 길을 만들어서 가다 보니 예상외로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느덧 주위는 어두워지고 헤드랜턴을 꺼내 불을 켰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배에서 꼬르륵거린다.

대장님이 배낭에서 먹을 것을 꺼내 먹으라고 하셨다.

어둠 속에서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음식을 꺼내 먹었다.

이때쯤에는 체력이 방전되어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길을 찾아 헤매며 천천히 걷다 보니 점점 추워진다.

패딩 재킷을 꺼내 입고 임병수운님이 주신 손난로를 옷 속에 집어넣고 걸어갔다.

오늘 밤은 달도 없고 별도 없고 캄캄하다.

헤드랜턴을 켰지만 2m 앞도 보이질 않는다.

길을 찾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대장님 이하 26명이 한데 뭉쳐 나아갔다.

이럴 때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면 그대로 죽게 될 것 같다.

그런데 난 왜 겁이 안 날까?

함께 있어서일까?

헤드랜턴을 켜고 줄지어 걸어가는 산우들의 모습이 마치 핼러윈 행렬을 하는 것처럼 멋지게 보였다.

철딱서니 없이 괜히 혼자 신이 났다.

기운이 빠진 이 순간에 이렇게 신이라도 나는 게 다행이라고 합리화를 해본다.

선두에서 길을 찾아 내려가던 사람들이 더 이상 길을 못 찾겠다고 하였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 GPS를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대장님이 나서보지만 속수무책.

다들 119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웅성거리는데 계곡이라 그런지 휴대폰도 안 터지고.

그때 옆에서 함께 가던 임병수운님이 선두에 서서 오룩스 맵을 보며 길을 찾아가셨다.

우리는 다들 말없이 그 뒤를 따르고.

앞 쪽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드디어 명개교가 나타났다.

 

이제부터는 임도를 따라 2km 정도만 걸어가면 된다.

그동안 나도 긴장을 했었는지 임도에 올라서자 갑자기 기운이 쭉 빠지며 다리가 풀렸다.

그런 나를 양 옆에서 임병수운님과 K현민님이 붙잡고 걸어가셨다.

안심이 되자 처음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도 없고 달도 없는 캄캄한 하늘.

헤드랜턴 불빛을 손으로 가려본다.

주위가 칠흑같이 어둡다.

내 손은 얼음장같이 차다.

그런데 이 어두움마저도, 이 추위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왠지 속에서 기쁨이 마구 샘솟아 오른다.

I opened a new era!!

8시 30분 오대산 내면 매표소에 도착.

 

선두에서 러셀을 하며 길을 내주신 산우님들,

후미에서 산우들을 챙겨주신 대장님,

어두운 계곡에서 침착하게 길을 찾아가신 산우님들,

옆에서 서로를 격려해주신 산우님들,

모두 모두 정말 멋지다!

I am proud of you all!